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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무주상보시_금강경


얼마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단어를 들었다.


무주상보시를 글자 그대로 풀이를 해보면.
"상(相)에 머무름이 없이 베풀라."는 것으로 풀이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중기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금강경≫을 중요시한 뒤부터 이 무주상보시가 일반화되었다.

불교 <금강경>에서는 ‘무주상(無住相)’을 강조한다. "무주상(無住相)"을 직역하면 "상(相)에 머무름(住)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세상 모든 상(相)과 염(念/생각)의 분별을 떠나 어디에도 결박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상(相)’이란 관념과 분별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네 가지 상으로 나눠 설명한다. 



중생이 열반에 오르지못하는것은  마음엔 이러한 네 가지 상(四相)이 항상 함께 하기 때문이다. 만약 상에 네 가지 함이 없다면 능히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무주상(無住相)’은 그 무엇도 누구에게도 기대고 바라지도 않고, 붙들고 붙들리지도 않는 것을 말한다. 탐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이 바로 무주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주상을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착해야 한다. 착하다는 것은 마음 비움을 말한다. 

무엇을 행동에 옮기면서 "꼭 성공해야지, 나는 실패하면 안돼,  너를 도우려고 하는 것이야, 이런 좋은 일은 알아주겠지?, 내가 이렇게 해 주면 틀림없이 고맙게 여길 거야...등,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것은 상(相)이 있는 마음이라고 하고, 이것은 무주상이 아니다. 

가난한 이에게는 분수대로 나누어주고, 진리의 말로써 마음이 빈곤한 자에게 용기와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모든 중생들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것이 참된 보시라고 보았다.

따라서 불교에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행하는 보시를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 한다. 이 무주상보시는 <금강경>에서 강조하고 있다.






❤️ 나는 언제쯤 깨닮음을 얻을 수 있을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버려야하는데...말이다.
알면서 못하는건 중생이기 때문인가?
kadoolmeh 2024